보람찬 하루

하루|하루 2009. 10. 28. 23:16 |
오늘 일하던 중 생긴 작은 해프닝 하나.

내가 최근 몇 번 가르친 학생 중에 유키라는 학생이 있는데,
(우리 학원은 매번 선생-학생이 바뀌는 시스템)
대략 20대 중후반 정도의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여자분이시다.
근데 이 분이 약간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신 분이라
(학생 프로필에 그렇게 써있고, 본인도 그렇다고 했음.)
엄청 민감하고 상처받기 쉬운 타입이기 때문에
난 평소보다 신경써서 완전 자상하고 친절하게 가르쳤다.
(← 까칠한 사람에게는 배로 까칠하고 여린 사람에게는 한 없이 부드러워지는 타입.)

그랬는데 오늘 저녁에 수업 쉬는 시간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리셉션 쪽으로 갔는데,
그 학생이 상담실 안에 웬 남자분하고 앉아있었다.
그래서 난 '상담 받고 있나... 저 남자는 누구지?' 그러고 있다가
눈이 마주쳐서 웃으면서 눈인사하고 스태프룸 쪽으로 가고 있는데,
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막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까 그 학생이었다.
그렇게 부랴부랴 달릴만한 캐릭터가 아니기에 난 놀라서 멈춰섰는데,
내 쪽으로 달려와서는 말을 걸었다.



유키 : Hello.

: Hi.

유키 : This is Yuki.

[보통 "This is..."는 상대방이 내가 누군지 안 보일 때, 즉 전화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고
난 지금 내 바로 앞에 당신 얼굴이 있으므로 누군지 알지만 뭐 당신이 유키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...]

: Hello. How are you?

유키 : I'm fine, thank you. [5초간 침묵] Are you ok?

: (얼굴에 물음표 백만개) Huh??



다짜고짜 "are you ok?" 라니;;
뭐가 괜찮냐는 거지? 붕대 감은 내 다리? 내 정신상태?



: What do you mean, "are you ok?"

유키 : Now... are you... um...

: Ah~ Do I have time?



사실 중간 쉬는 시간은 5분밖에 없어서 그닥 시간은 없었지만
그래도 날 이렇게 애타게 찾는데는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괜찮다고 했더니,



유키 : My boyfriend is in the room.

: .............. 응?



알고 봤더니 상담실에 같이 있던 남자분이 남친이었던 것이다.
난 그저 그 학생이 수업시간에 남친 얘기를 자주 하길래 닥치고 잘 들어줬을 뿐인데.
날 남친에게 소개하고 싶다며 같이 가자고;;;
난 이런 시츄에이션은 당최 처음이라 넘 당황스러웠지만
거절하면 상처 받을 그 학생을 생각해서 흔쾌히 ok하고 같이 상담실로 고고싱.

근데 상담실로 가는 길에 갑자기 그 학생이 "I love your lessons!" 라고 했다.

순간 세상 어떤 피로회복제보다도 필요 없었다.
온 몸에 엔돌핀이 솟구치면서 진심으로 기뻤다.
물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말해준 학생은 많았지만,
("You are the best teacher"까지 나왔었는데 뭘. 훗~)
이번 경우는 좀 특별하니까.

근데 그 후에 상담실에 들어가서 남친하고 악수하고 통성명했는데
참을 수 없는 뻘쭘함이 엄습해오고...... -_-;
이런저런 쓰잘데 없는 얘기 하는 와중에 수업종이 울리고,
닥치고 일하라고 등 떠미는 수업종 소리가 그 땐 왜 그리 아름답게 들리던지.
만나서 반갑다고, 나중에 보자고 하고 난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.



아 정말 덕분에 오랜만에 이 일을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.
그 학생은 별 생각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
나에게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구나, 라고 생각하면서
정말 말 한 마디에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이 있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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